“독창성이 없어요. 와인은 테루아르(Terroir)를 담아야 합니다. 신세계는 피노누아를 재배하지 말아야 해요.” 프랑스 최고 와인 로마네콩티 집안의 여인으로 현재 도멘 르로아를 운영하고 있는 ‘부르고뉴 여왕’ 랄루여사는 평론가 잰시스 로빈슨과의 인터뷰에서 입에 머금고 있던 오레곤 와인을 바닥에 탁 뱉으며 독살 맞게 목소리를 높인다. 균질우유처럼 잘 만들었으나 테루아르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와인재배에 천문학을 응용하며 우주의 에너지와 인간의 영혼이 담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실제로 자신의 2004년산 와인에 대해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며 와인등급을 낮춰 시장에 내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빈티지가 좋은 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등급을 낮출 정도는 아니었다. 소비자들이야 좋은 와인을 싸게 마실 수 있어 좋지만, 그해 남편을 잃고 슬픔으로 와인을 만들어야 했으며 가슴앓이가 와인 속에 좋은 에너지를 불어넣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와인만들기가 단순한 노동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이다.

테루아르, 와인 속 유·무형 에너지이렇듯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 이야기를 꺼내면 테루아르로 시작해서 테루아르로 끝을 맺는다. 따라서 뜨고 있는 신세계 와인을 경계는 하지만 결국은 애호가들이 프랑스 와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애써 태연해 한다.

그럼 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테루아르’는 뭔가. 와인의 개성과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환경으로 보면 된다. 즉 기후, 토양, 지형, 채광에 인간의 노력까지 한 병 속에 숨쉬는 모든 자연의 유기물을 테루아르라고 한다.

같은 보르도라도 테루아르의 차이는 크다. 지롱드강을 기준으로 좌안 메독지역은 땅에 영양분이 많고 메말라야 잘되는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이용하여 떫고 강한 와인을 생산한다. 지형적으로 초여름에는 건조해져 지하수층이 아래로 내려가는 역할을 하며 포도가 익는 시기에 저절로 수분조절이 된다.

반면 메를로가 주 품종인 강 우안 포므롤, 생테밀리옹은 토양 자체가 다르다. 메를로가 잘 익기 위해서는 토양에 습기가 많아야 하는데, 이곳의 흙은 점토질 성분으로 스펀지 역할을 하면서 땅을 늘 촉촉하게 유지해준다. 모나지 않고 진흙 감촉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와인들이 나온다.

또 과거 바닷물에 잠겨 굴 껍질 화석 등이 발견되는 샤블리나 남프랑스쪽 와인은 짭짜름한 미네랄 향취가 감돈다. ‘테루아르의 맛’이다.


와인언덕배기에서 적당한 배수와 햇볕의 혜택, 영양분을 받으며 열매와 이파리 수를 줄여 강인하게 키운 포도나무는 그 뿌리가 10m 이상 뻗으며, 땅 아래쪽 각종 미네랄을 흡수하여 독특한 풍미를 지닌 그 지역만의 에너지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연중 마른 날씨와 관개기술로 포도나무를 ‘고통 없이 키워낸’ 칠레, 미국 등 신세계 와인들은 대체로 맛이 복잡하지 않으면서 달고 풍성한 과일 향을 보인다. 해서 초보자들 첫 와인으로 접근이 쉬운 것이며,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소비자의 U턴’을 자신하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명품 와인들은 테루아르의 특권을 쥔 셈이다.

보르도 특급 샤토 마고의 주인 코린 멘젤로폴로스는 “투자를 하고 열정을 쏟아도 와인은 늘 같은 결과를 주지 않는다”며 “마고 밭에서 1~3㎞만 떨어져도 와인 맛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밭고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특급와인과 그저 그런 동네 와인으로 나뉘는 것이 테루아르의 진실이다.

품종을 블렌딩하여 좀더 가치 있는 맛을 찾아내는 보르도와 달리 피노누아 단일 품종으로 그해 테루아르의 영향력이 와인농사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부르고뉴는 자존심이 더 크다. 부르고뉴 전설적인 양조자 앙리 자이에는 양조비결에 대해 “자연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며 사람들은 간섭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얼마전 세계적인 와인 컨설턴트로 ‘블렌딩 달인’으로 불리는 미셀롤랑은 한국와인협회 세미나에서 명품 와인의 조건에 대해 “테루아르가 베풀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을 수는 없다”며 “뛰어난 와인은 결국 좋은 포도와 테루아르가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르도에서 지난 70년간 최고 빈티지는 고작 6~7개밖에 안 되는데 이는 최상의 상태로 잘 익은 포도만이 유일한 텍스트였다고 하면서 테루아르가 비결이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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